Crusader Kings

리뷰 2007/12/30 04:10

십자군왕들(Crusader Kings, CK)는 철의 심장(Heart of Iron, HOI), 유럽통일(Europa Universalis, EU), 빅토리아(Victoria) 같은 굵직한 하드코어 전략 게임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패러독스(Paradox Interactive)의 게임이다. 다른 게임들이 그러하듯 CK는 같은 게임 엔진에 약간의 새로운 테마와 게임 컨셉을 이용해서 만든 게임이라, 그래픽 면에서 보자면 EU에서 크게 발전된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CK는 CK만의 독특한 장점이 있으니, 그것은 중세 영주들의 관계 관리와 그 영주들의 혈통 관리에 핵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전략 게임의 내용이 땅따먹기에 국한된다는 것은 사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기 땅의 군사력을 키워서 다른 땅 주인과 연합하고 침략해서 자기 부하로 만든다거나 하는 정도에 한정되던 게임 내용을, CK에서는 영주 자리를 뺏거나 임명하고, 배반하고 배반한 영주들을 응징하고 하는 식의 좀 더 복잡한 형태로 발전시켰다. 게다가 백작(Count), 공작(Duke), 왕(King)의 3단계로 되어 있는 영주의 봉건 계급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고 할까.

각 영주는 기본적으로 한 개의 땅을 지배하고 있을 경우 백작이 된다. 여러 개의 땅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왕이 공작 작위를 내려주지 않는다면 이 영주는 평생 백작으로 다른 공작의 지배를 받으며 살 수 밖에 없다. 만약 왕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백작에게 공작 작위를 내리면서 '너는 Lothian 지역의 공작이 되거라'하면 실제로 Lothian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백작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작의 밑으로 배속된다. 배속된 공작이 아주 약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경우라면, '저 공작 작위는 원래 내꺼다'라고 주장(claim)하고 그 작위를 건 전쟁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작위를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전쟁에 이겨도 그 작위만 따먹을 수 있다.

그렇다. CK에서 모든 전쟁은 이렇게 '작위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시작된다. 만약 주장하는 작위가 없으면 전쟁 선포(declare war) 자체가 안된다. 설혹 전쟁 선포를 했더라도 갑자기 교황이 나서서 '이제 그만 싸우지 그래?'라고 중재를 하면 들어야하고, 교황을 무시하면 신앙심이 깎이면서 모든 영주들이 얕잡아 보기 시작한다. 혹여 왕이라도 신앙심이 부족하다면 밑의 공작들과 백작들이 만만하게 보고 배반을 일으키는 것이 수시로 일어난다. 그래서 왕이 되었다면, 명성과 신앙심을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각 지역의 영주들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도, 왕이 왕위를 무조건 자기 아들에게 넘겨주고 세습하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가 왕이면 일단 장남이 작위를 넘겨받게 되는 건 맞지만, 장남이 장남을 갖지 못한 경우 이제부터는 상속 전쟁이 일어난다. 아버지의 차남이 다음 권리를 가지고 있고, 삼남, 사남이 있으면 또 상속을 순서대로 줄 서서 기다린다. 만약 장녀가 시집이라도 갔다면 장녀의 장남도 엄마의 형제들이 모두 죽었을 때 상속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더 이상 같은 혈통에 상속할 수 없는 경우, 앞의 장녀의 장남이 상속받게 되는 경우, 게임은 종료된다. 즉, 이 게임은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즐기는 게임인 거다.

그래서 영주가 된 된 플레이어는 항상 혈통 관리를 열심히 해야한다. 현재 상속 1순위가 누구인지를 꼼꼼하게 체크하고 만약 다른 혈통에서 상속 1순위가 되었다면 과감히 암살자를 보내서 상속자를 우리 가문이 받도록 만들어야 한다. 애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들였다면, 얼른 암살하고 애 잘 낳는 20대 초반의 부인을 새로 맞이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왕은 끊임 없이 아들을 낳아 다음 상속자가 내 혈통에서 나오게 만들어야만 내가 게임을 계속 해나갈 수 있다.

오 그렇다면 이 응용은 적국에 대해서도 가능하겠다? 그렇다. 먹고싶은 땅의 영주가 자손이 없다면 과감히 내 딸을 시집보내서 (기존 부인은 이미 암살되었고) 내 손자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직계가 아니라 좀 힘들기는 하다) 아니면 그 영주의 장녀에게 내 아들을 시집 보내서 손자 대에는 내 혈통에서 상속을 받게 만드는 것도 또 방법이다.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누굴 암살하고 누굴 상속받게 하느냐 하는 혈통 퍼즐 맞추기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혈통의 교배에서 훌륭한 혈통으로 좋은 능력을 가진 자식을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꾸준히 돈을 모으고 명성과 신앙심을 쌓아서 암살하고 교배시키고 상속시키는 재미는, 사실 전쟁보다 훨씬 크다. 군사력으로 남의 땅을 먹는 게임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이 게임은 처음에 왕으로 시작하는 쪽이 가장 재미있는 편이다. 백작이나 공작이 된다면 일단 암살을 하기도 매우 힘들고 (암살에는 많은 돈과 명성, 신앙심이 필요하다) 그렇게 암살과 전쟁으로 공작 작위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사실상 매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왕이 상속자 없이 다른 혈통에 넘겨주는 경우가 좀처럼 많지 않다. 간혹 양자(foster child)를 보낼 수도 있지만, 상속을 받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고.

게다가 왕국이 이렇게 여러 과정을 거쳐 성장한다고 해도, 병력을 직접 일으켜 전쟁하는 게 아니라 영주들에게 '병력을 보내라'고 명령해야 하는데, 영주들의 충성도에 따라서 병력이 차출되거나 거부되기도 한다. 만약 징병을 거부한 영주가 있다면 이 영주는 곧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 되므로 전쟁을 일으키려고 병력 동원을 했다가 '어라 이게 아닌데' 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그리고 각 지역의 병력을 한 곳으로 모아서 쳐들어가기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이렇게 징병된 병력의 운영비는 왕이 내야하므로 왕국의 자금 소모도 엄청나다. (이런 이유로, 간혹 교황이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라고 하면 피눈물이 난다)

어느 땅따먹기 전략 게임이나 그렇지만, CK는 일단 잡으면 최소한 수십 시간의 플레이 시간이 필요하고 중독성도 대단하다. 매 번 새로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다시하고 다시하게 되는 게임이다.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시작해서 아일랜드와 웨일즈, 영국을 통일하는 왕이 되었다지만 일 순간 세째 아들의 반란으로 왕국이 사분오열 되기도 하고, 세째 아들의 상속자를 싹 쓸어버리고 다시 손자 대에서 상속받아 왕국이 다시 통일되기도 한다. (왕위는 오랜 기다림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거의 2주 가량을 CK에 빠져 퀭한 눈으로 출퇴근을 하게 된 자신을 발견하고, CK를 봉인하게 된 한 사람이 여기 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