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통일: 로마(Europa Universalis: Rome)
리뷰 2009/01/06 14:13유럽 통일(Europa Universalis, EU)은 2000년 부터 시작된 패러독스(Paradox Interactive)의 대표 시리즈 타이틀이다. 2007년 1월 3편이 나왔고 대단한 호평을 받았으며, 2007년 여름 '나폴레옹의 야망(Napoleon's Ambition)'과 2008년 봄 '이름 아래(In Nomine)'가 출시됐다.
이 시리즈는 매니아들 사이에 워낙 유명해서, 매니아들이 꼽는 폐인을 위한 명작 전략 게임에 거론되곤 한다. 초권력(Super power 2)이라던가 유럽 통일(EU) 시리즈, 삼국지 시리즈, 간혹 관리 게임도 전략 게임으로 넣어준다면 축구 감독(Football Manager) 시리즈까지.
왜 로마인가
EU가 1편부터 순서대로, 고대 국가, 중세, 근대를 아우르고 나서 로마 시리즈를 만든 것은 어쩌면 이제 필연적인 선택이다. 더 이상 통일할 시대가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러독스는 1편부터 연도 제한이 걸린 하나의 본편을 내고 확장팩으로 연도 제한을 풀어주는 판매 방식을 유지해 왔는데, 3편에도 다르지 않았고 사실상 이제 20세기를 건드려야 할 차례였지만 이미 20세기는 철의 심장(Heart of Iron, HOI)라는 또 다른 시리즈가 자리잡고 있는 시대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러독스가 현재 EU의 4편을 만들고 있다면 아마도 1편 시대의 재활용(revival)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류사 전 시대를 아우르는 2천 년을 배경으로 하는 초거대 게임이 되거나. (물론 그럴리는 없다.)
패러독스 전체 게임들의 짬뽕
사실 EU 시리즈는 거시적인 전략 관점을 줄곧 견지해온 얼마 안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국가의 몇 가지 정책을 결정하고 전쟁을 시작하거나 멈추거나 부대들을 생산해서 병단을 만들고 이동시키는 정도의 선택만으로 게임을 진행한다. 간혹 훌륭한 장군이 태어나면 땅을 왕창 넓혔다가 삽질하는 왕이 태어나면 영토가 급격히 위축되는 식의 마치 진짜 역사 같은 플레이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패러독스는 이런 거시적 전략 관점의 게임뿐 아니라 좀 더 세세한 관리가 필요한 중세 배경의 게임들을 낸 바 있다. 십자군왕들(Crusader Kings, CK)이라던가 명예의 기사들(Knights of Honor, KOH) 같은 게임들은 영토와 전략을 관리하는 것 뿐 아니라 영지 안의 귀족들과 왕위 경합도 해야하고 이들의 충성도도 관리해야 하는 등 좀 더 플레이어의 할 일이 많은 게임들인데, 대충 비교해서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와 비슷한 내용이다.
문제는 이번 로마(Europa Universalis: Rome)가 거시적인 관점을 버리고 CK나 KOH 스타일의 자원 관리를 취했다는 것이 매우 놀라운 변화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지껏 EU 시리즈에 이런 자원 관리가 없던 것이 '몰라서 못한 것이냐 안해서 안한 것이냐'의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건 거시 전략의 관점을 유지해왔던 시리즈에 이런 세세한 자원 관리가 들어갔다는 것은 앞으로 EU 시리즈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게다가 오히려 기존 EU 팬들에게 이게 환영할만한 일인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고.
공화정과 왕정
그래서 로마를 플레이하는데 플레이어는 내우와 외환을 모두 관리해야 한다. 안으로는 국가 지도자로써 경쟁 귀족들의 지지도를 유지해야 하고 밖으로는 경쟁국가들과 생존 경쟁을 해야만 한다. 만약 이 둘 중 하나라도 삐끗하는 경우에는 안에서는 귀족들이 후계자에 반발해서 내전(civil war)을 일으키고 밖에서는 대 병력이 쳐들어오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로마가 공화정이라는 거다. 로마와 카르타고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왕정이나 혹은 왕정에 유사한 형태라지만, 로마와 카르타고는 의석에 따라 정부의 의견이 변하고 지도자가 수시로 바뀌는 통에 이 귀족들의 지지도 관리가 훨씬 복잡하게 진행된다. 게다가 의석을 뺏고 뺏기는 의회에 다섯 개의 당파는 모든 메시지를 꼼꼼히 읽어보지 않으면 안될 만큼 복잡한 정치 정략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로마는 로마로 플레이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게임을 즐기는 방법이다. 나처럼 별난 취향으로 마케도니아나 스파르타 같은 나라를 골랐다가는 시작부터 끝까지 남의 속국이 되거나 국가 확장이란 건 꿈에서나 가능한 난이도를 경험해야 한다. 이전 시리즈에서도 약소국을 골랐다면 진행이 힘들었다지만 로마는 더하다.
정복이 아니라 확장이다
왜냐하면 게임의 테마가 땅을 정복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빈 땅'에 식민지를 건설해 확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유럽의 70% 정도는 야만인들(babarians)이 자리 잡고 있는 '빈 땅'이고, 이 땅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문명도와 충분한 인구(십만)가 필요하다. 만 명의 인구가 5%씩 증가해서 십만 명이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 대부분의 진영은 땅 하나에 1~2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고 오직 로마의 로마 만이 80만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 언밸런스는 게다가 철저하게 로마 위주로만 돌아간다. 풍부한 인구와 이탈리아 반도 위쪽의 휑하니 비어 있는 땅. 아웅다웅 싸우고 어쩌고할 상대 자체도 없고 시간이 흐르면 인구는 증가한다. 말하자면 밖의 걱정꺼리는 없다는 뜻이고, 숙적 카르타고만 제압하면 지중해의 패권은 이미 로마에 반 이상 기운다고 봐주면 된다.
그래서 로마는 시작부터 풍부한 자원과 풍부한 빈 땅을 놓고 무한정 뻗어나갈 수 있다. 셀루시드 왕조가 이집트와 싸우며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지중해의 중심으로 나서기 위해 수없이 전쟁을 거쳐야 하는 것에 비해, 마케도니아가 셀루시드 왕조의 위협에 버티면서 주변 국가들을 제압하고 이베리아의 강자로 성장하는 것에 비해서 로마는 확장이 너무 쉽다.
자원 관리 테스트
로마는 아무래도 이런 거시적 전략과 자원 관리의 사이에서 밸런스가 덜 되어 있는 게임이다. 기술 개발을 위해 각 기술에 담당자를 지정하고 의회 혹은 자문역들을 우호적인 귀족으로 채워야 하며 각 지역의 총독들도 우호적인 인물로 유지해야 한다. 유력 가문이라면 한 자리 정도는 챙겨 주는 걸로 입막음을 해줘야 하기도 학고.
이것들이 지나치게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게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플레이어는 외국과의 외교 문제들은 가급적 비전쟁 상태로 유지하며 귀족들만 관리하는 걸로도 충분히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데, 이 귀족들이 실상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에게 불리한 점만 제공할 뿐 이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결국 이렇게 '실수하면 망하게 되는 요소'에는 긍정적 보상 없이 '잘하면 본전, 삐꺽하면 쪽박'의 구조로 플레이어게 살얼음판을 걷는 요소로 작용한다.
패러독스는 이미 CK나 KOH에서 이런 귀족 관리를 시도했던바가 있고, 이런 게임들의 경험을 활용해 거시 전략과 자원 관리의 요소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첫 시도로 좀 덜 경쟁적이고 외교의 압박이 적은 시대인 로마를 골라 이 새로운 시스템을 테스트해보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래서 EU의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다른 확장팩들처럼 부제의 형식으로 출시되었다.
독립 타이틀로 보기에는 부족
사실 가장 결정적인 로마의 단점은 로마가 하나의 본편처럼 위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존 EU 팬의 입장으로 보기에 빅토리아(Victoria) 같은 독립 타이틀은 아니면서 로마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작은 글씨로 EU의 속편임을 보여주는 것이 이를 시사한다.
물론 로마가 기존 EU에 비해 국가 안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면에서는 상당히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기존 EU 시리즈들이 보였던 변화에 비교하자면 EU3와 로마의 차이는 굉장히 미약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플레이어가 플레이할 수 있는 국가나 게임의 진행이 기존 EU 시리즈처럼 정복이나 통일이 아니라는 것도 상당히 큰 차이이다.
느긋하게 앉아 귀족들에게 뇌물을 먹여가며 충성을 유지하고 인구를 불려 식민지를 건설하며 땅을 불리는 느긋한 플레이는 EU 시리즈에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치고 박고 야합과 외교로 전쟁 판으로 진행한다면 몇 없는 국가들 먹어 치우기 그리 어렵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 전쟁을 계속 하다가는 인구가 점차 줄어들어 식민지 건설을 방해하고...
그래서 EU의 팬이라면 로마는 별로 손댈 필요가 없는 타이틀이라고 보면 된다. EU답지 않은 요소들과 급격한 분위기 변화, 그리고 조율되지 않은 내용들은 오히려 EU 팬들에게 걸끄러운 요소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EU의 팬들이라면 이제 로마로 시도했던 변화와 새로운 요소의 도입이 앞으로 EU4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변화를 줄 것인지를 기대하는 것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