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퀘스트의 망령들
일반 2008/12/18 03:12MMORPG의 역사에서 그 창대한 시작의 첫 머리를 울티마 온라인(Ultima Online, UO)이 장식했다면, 이후 모든 북미식 파티플레이 MMORPG의 씨를 뿌린 게임은 에버퀘스트(Everquest, EQ)였다. 기존 MUD에서 가지고 있던 기초적인 전사, 도적, 마법사, 사제(전도마사)의 골격을 확장해서 각 클래스의 개성적인 능력들을 부여하고 이들이 협동할 수 있게 역할 분담을 만든, 현대 MMORPG의 토대를 만든 게임이었다.
그리고 그 EQ를 만든 개발팀들은 전세계 MMORPG 개발사로 흩어져 지금도 많은 MMORPG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EQ를 플레이했던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제 MMORPG 개발자가 되어 그 경험을 개선하고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아이온은 그런 EQ 플레이어들이 만든 게임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 EQ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덜 이야기된 것이 현대 MMORPG가 가진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고, 이 글에서는 EQ에서 결코 배우지 말았어야 할 것과 배워서 발전시켜야 했던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아이온과 WOW의 무엇이 다른지, 양쪽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지 말았어야 하는 것들
* 불친절한 퀘스트 동선과 낮은 밀도
EQ의 퀘스트는 플레이어에게 어느 지역에 적당한 레벨의 몹이 존재한다는 안내를 하는 역할이 아니었다. 지금의 MMORPG들이 퀘스트를 이용해서 플레이어들이 레벨링을 한다거나 퀘스트를 통해서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한다거나 하는 것은 WOW를 통해서 완성된 개념이고, 그 이전의 게임들의 퀘스트는 거리나 적정 레벨, 플레이어의 시간이나 노력에 대해서 별로 고민하거나 계산해서 경로를 유도하거나 하지 않았다.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퀘스트를 하러 가다가, 하고 오다가, 혹은 무작정 배회하다가 대충 비슷한 레벨의 몹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같은 종류의 몹을 주구장창 사냥하게 된다. 퀘스트가 있건 말건 그저 몹이 팝 - 팝(pop), 젠(gen), 스폰(spawn) 모두 같은 말이다 - 되기를 기다렸다가 잡는 방식.
* '사냥터' 개념과 고정된 스폰 장소
이런 플레이가 가능했던 것은 항상 같은 장소에 항상 같은 몹이 팝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이미 여러 게임들에서 나와 있지만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종류와 정해진 장소에서만 팝되는 종류를 섞어서 활용하는 것이 최근의 분위기이고, 특히 몹들이 제 자리에 서있기 보다는 자주 특정 경로를 이동하는 형태를 통해서 플레이어들이 한 자리에 죽치고 앉아 사냥하는 것을 막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렇게 플레이어들이 한 곳에 모여 특정 몹들을 사냥하게 되는 원인에는 퀘스트의 보상이 지나치게 적거나 레벨링에 필요한 경험치에 비해서 퀘스트의 수가 적거나, 혹은 퀘스트가 없거나 하는 등의 원인이 있기 때문이고, 플레이어들은 기회비용들을 고려하여 유리한 쪽을 선택하면서 발생한다.
* 지나치게 긴 리스폰 시간
EQ와 같이 인스턴스가 존재하지 않는 게임에서는 - 모두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한다는 면에서 - 현실감을 살릴 수 있는 반면 특정 몹을 잡아야 한다거나, 특정 장소에서 특정 물건을 회수해야 한다거나 이름 붙은 몹(named mob)을 죽여야 하는 경우 이들이 사라지고 나서 재생성되는 시간이 매우 중요한데, EQ에서 이 대상들이 짧게는 몇십 분에서 길게는 몇십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노리는 플레이어들은 근처에서 줄을 만들고 대기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 대기 시간을 계속 모니터를 쳐다보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장기간 시간을 보내는 플레이어들이 실제로 많았고, 이들이 한눈 파는 틈을 노려 새치기를 하거나 했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항상 대기 상태로 있어야 했다. 결국 이런 대기 순번을 지키던 플레이어가 과로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게임이 직접적으로 원인을 제공했는가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보류되고 있다.
* 의미없는 마라톤
EQ는 지나치게 넓은 맵도 큰 문제가 되었다. 플레이어들은 넓고 광활한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지만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가야하는 경우 '빠르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었고 덕분에 이를 원활하게 해주는 몇몇 클래스들은 플레이어들에게 꽤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는 DAOC에서 역마가 등장하면서 대안으로 호평을 받은 후에 SWG, WOW, 워해머 온라인(Warhammer Onlien, WAR)로 이어져 마을간 이동을 쉽게 할 수 있는 수단들이 보편적이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거리의 정도를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적당한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 의미 없는 진영 구분
초반 EQ는 선과 악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긴 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더 이상 진영 구분이 의미가 없게 됐다. 이 진영은 DAOC에서 왕국(Realm)으로 계승되어 본격적인 RVR 개념으로 연결되었지만, EQ에서는 이 진영을 나눈다는 개념을 뒷받침할 컨텐츠가 사실상 없었던 것을 보면 설계시 컨셉에서 모험 게임인지 PVP 게임인지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못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EQ의 개발자들은 아마도 1인칭으로 진행되던 당시 게임 형태에서 PVP를 진행하는 것이 무리였다고 판단했던게 아닌가 추측된다.
* 우호도 노가다(faction grinding)
결정적으로 EQ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던 것을 꼽으라면 특정 진영과의 우호도(faction: 우호도, 평판 등으로도 번역된다)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는 우호도 1점 2점을 주는 몬스터를 잡아서 만 점 단위를 채워야 하는 것들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이를 통해서 악 진영이면서도 선 진영의 마을에 중립 정도의 우호도를 갖게 되어 경비병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되며, 우호 상태가 되면 상점 거래 등을 할 수 있었다.
배웠어야 하는 것
* 클래스의 필요성 관점에서 밸런스
EQ가 MMORPG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했던 것은 MUD의 텍스트 표현을 3D로 옮겼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고전적인 전도마사의 컨셉을 유지하면서 협동을 유도하는 롤플레이를 살렸다는 것, 그리고 이 핵심 클래스 외에 잡종 클래스(hybrid class)들이 명확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클래스의 명확한 능력 분배였다. 이를테면 파티 안에서 전도마사의 기본 역할 즉, 탱킹, 데미지 딜링, 힐링의 기본 역할 외에 캐릭터들의 능력 뻥튀기(buff, 버프)나 혼잡 조절(crowd control), 광역 마법, 풀링 - 멀리 있는 몹을 파티원들이 있는 곳까지 유인해 오는 작업 - 등에 '다른 클래스들은 못하는 능력'을 부각시키고 있어 핵심(탱커, 힐러) 외 클래스들을 파티에서 영입하면서 "아 저 클래스는 ~가 좋아서 쓸모 있다"는 필요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물론 EQ는 나중에 20개 이상의 클래스가 만들어졌고 이런 구분이 좀 덜 안정적이게 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 독특한 캐릭터들의 외모
EQ는 십여 개가 되는 종족들은 모두 독특한 외모와 능력들를 가지고 있었다. 환타지 세계의 단골 종족인 엘프와 드워프 뿐만 아니라 노움, 트롤, 리자드맨, 오우거 같은 종족들이 있었고 심지어 엘프는 우드 엘프, 하이 엘프, 다크 엘프 등으로 구분되었으며 인간도 북유럽 게르만을 컨셉으로 한듯한 자이언트와 흑인 에루다이트가 존재했다. 물론 이들이 실제 선택되고 플레이되는데는 꽤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플레이어들은 그 외모나 컨셉을 보고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이것들이 노래쓰(EQ의 세계)를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핵심이기도 했다.
* 다양한 선택의 폭
종족 뿐만 아니라, 같은 레벨 같은 등급의 아이템들도 공격 속도, 데미지, 방어력, 특별 효과들을 가지고 있어 플레이어들은 한두 아이템에 집중되거나 모두가 같은 외형을 갖는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 글의 결론
그래서 아이온을 플레이할수록 난 개발팀이 발표한 "우리는 에버퀘스트를 많이 참고했다"는 말이 헛소리로 들린다. 정작 배워왔어야할 좋은 점들은 배우지 않았고, 배우지 말았어야할 나쁜 점들은 고스란히 아이온 안에 존재한다. 지나치게 많은 경험치 요구량, 부족한 퀘스트, 퀘스트를 하기 위해서 수십 시간을 기다려야 하거나 인던의 드랍템을 먹기 위해 수십 번을 반복해야 하는 것 뿐 아니라, 사냥터에 자리잡고 앉아 주구장창 같은 몹을 때려잡는 무의미한 필드 던전의 파티플레이, 그리고 버려지는 클래스들까지.
도대체 그들은 EQ의 무엇을 배워 참고한 것인가.
과연, 참고하기는 한 것인가.
EQ를 참고했다는 그들의 발언이, 혹여 EQ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최근 십여 일 동안 아이온을 하느라 정신 없었다.
- 이제 슬슬 정신 차려야할 때가 된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