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어(Spore)

리뷰 2008/09/10 20:34

윌 라이트(Will Wright)는 헬리콥터 액션 게임을 만들다가 '어 레벨 디자인 툴 가지고 노는게 더 재밌네?'라면서 우연하게 발견한 게임성을 확장시켜 심시티(Sim City)라는 게임을 만들었고, 이후 심 어쩌구 시리즈에 이어 심즈(The Sims)를 만들면서 '장난감론'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확정했다.

그리고 스포어가 2005년에 E3에서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 대상이 되었고,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스포어는 처음 심몽땅(SimEverything)으로 2000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후에 크리처 창조기라고 알려진 툴을 사용해서 생명체에 주둥이와 팔 다리를 이렇게 저렇게 붙이고 몇 가지 장식들을 붙이면 그럴듯한 생명체가 창조되는 신선한 방식을 선보이면서, '이런 크리처들을 만들어서 데리고 놀 수 있다'고 기대를 자아냈다.

말하자면, 기존의 심 시리즈가 도시를 만들거나, 개미굴을 파거나, 헬리콥터를 가지고 도시 상공을 날거나 하는 특정 테마에 한정되었던 것에 비해서 이제 생명체를 창조하고 그 생명체로 플레이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될 거라는 기대였다.

자유도의 포기
하지만 출시된 스포어는 이와 달랐다. 크리처를 창조할 수는 있지만 이 크리처들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되는 것이고 일정한 진화 포인트를 모으면 자연스럽게 (혹은 다른 말로 '등 떠밀려서') 다음 단계(phase)로 넘어가야 했다. 게다가 각 단계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까지 너무 짧은 데다가 플레이어가 각 단계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는 '뭘 어떻게 붙일까'와 '저 놈들을 멸종시킬까 친하게 지낼까'하는 것 뿐이다.

이렇게 되자 플레이어게 주기로 했던 자유도는 사라져버리고 '유닛을 진화시킨다'는 컨셉은 말하자면 구색 맞추기로 남아버리게 됐다. 결국 어떻게든 플레이어는 (치명적인 실수가 없는 한) 유닛을 진화시키게 될 것이고 우주 단계로 넘어가서 다른 종족들의 요구에 따라 이 별에서 저 별로 퀘스트나 수행하럴 다니는 '배달부 인생'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게임이 이렇게 된 이유를 두 가지로 추측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스포어 유감'이라는 글에서 언급했듯 개발 기간의 문제이다. 2000년부터 개발(기획만이겠지만)했고 2005년에 일반에 공개했다면 실제 개발 기간은 무려 8년, 표면적인 개발 기간만도 4년이 된다는 거다. EA가 그렇게 인내심이 많은 퍼블리셔가 아니라는 것과 4년이나 만들고서 이것 밖에 안되느냐는 내외부의 목소리가 없을리가 없다. 나름 공을 들인 크리처 생성기에 (물론 훌륭하긴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린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 상태로는 크리처 생성기가 아니라 게임 내용 부분에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고 보인다.

또 하나의 추측은 원래의 컨셉 - 심몽땅 - 인 우주 여행 게임이 와전되어 생명체 창조 게임으로 알려진 것이고 윌 라이트는 그냥 원래 컨셉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쩌다 보니 생명체 창조 게임이라고 '우리가 잘못 추측한 것'이고 윌 라이트는 제 컨셉대로 그냥 우주 탐험 게임을 개발 했을 뿐인거다.

어쨌든 (이유가 뭐던) 스포어는 우주 단계 이전에 별로 자유도라는 걸 찾아볼 수가 없게 됐다. 크리처를 진화시키는 부분에서나 부족, 문명이  발전하는 단계에서나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는 이전 다른 게임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도 만큼의 자유도이거나 혹은 그 이하이지 윌 라이트 특유의 '맘대로 갖고 노세요'라는 모래판(sand box) 컨셉으로 봐줄 수가 없다. 심하게 말하면 '이건 윌 라이트의 게임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수준'이 돼버린 것이다.

스포어 전체를 한 화면으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타임라인은 이런 '부끄럽게 하는' 것들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플레이어가 한 플레이 기록을 어떻게던 보여주려다 보니 끼워 넣었지만, 사실상 진화가 아닌 것을 진화인 것처럼 보이는 역할 외에는 플레이어의 자유도를 제약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초적인 실패 요소가 됐다. 유전자(gene)를 줏어먹은 량과 새끼를 낳는 횟수에 따라서 변형하는 모습을 기록하는 뿐, 진화라고 불러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각 스테이지의 안배 실패
뿐만 아니라 이렇게 단계별로 진화하는 과정이 각 단계 - 세포 단계, 크리처 단계, 부족 단계, 문명 단계, 우주 단계 - 에 골고루 안배가 되어 있느냐하면 그것도 아닌데에 또 문제가 있다.

세포 단계는 무작정 이것 저것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걸 잘 골라서 줏어 먹다 보면 통과하게 되고, 크리처 단계는 얼마나 많은 다른 크리처들을 만나 관계(죽이던 친해지던)를 맺느냐하는 것에 달려있으며, 부족 단계는 '누굴 먼저'를 선택할 수 있을 뿐 사실상 악기 세 가지를 모으기 전에 평화를 논하기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문명 단계에서는 플레이어가 크리처 단계에서 우연히 붙인 주둥이에 의해 결정 되어버린 종교, 경제, 전쟁으로 운명이 지워진다.

그나마 종교와 전쟁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뭔가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반면, 크리처 단계에서 잡식성 주둥이를 우연히 획득해서 아무거나 먹을 수 있다는 장점에 붙이고 다녔던 플레이어라면 경제로 무역을 통해 도시를 구입하는 방법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 경제적인 영향력이라는 건 게다가 '넌 약해서 무역을 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당하거나 지형상 섬에 갖힌 경우에서는 전혀 발효될 수 없는 것이라, 플레이어의 선택과 무관하게 게임의 향방이 결정되어 버리는 매우 치명적인 설계 오류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찌어찌 우주 단계에 들어서면 플레이어는 문명 단계의 연장선에서 다른 종족들과 관계를 하기 시작한다. 그나마 일반적인 4X 게임들보다는 조금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4X 게임들의 '전략적 관점(플레이어가 종족 지도자의 입장에서 여러 함대를 운용하거나 하는 등의 관점)'에 비해 비행기 한 대 덜렁 끌고 혼자 망망대해를 헤치며 우주적 무역과 외교를 해야하는 부담을 짊어진다는 면에서 훨씬 불리하고 불편하다.

플레이어는 종족 유일의 우주 비행선 조종사이고 플레이어가 돕지 않으면 플레이어 종족의 행성은 우주 개발도, 다른 외계 문명과의 교류도, 심지어는 외계 문명의 침략에 대한 방어도 스스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은하계 반대 쪽에서 한창 새로운 종족과 외교 관계를 위한 배달 임무를 수행하다가도 종족 행성의 연락이라도 받으면 부랴부랴 돌아와 행성을 방어해주고 다시 은하계 반대쪽으로 뛰어가야 하는 고달픈 삶을 플레이 해야한다.

뿐만아니라 이 우주 단계는 이전 단계들이 후딱후딱 넘어가던 것에 비해서 세월아 네월아 만나고 만나도 끝 없는 우주를 돌아다니며 전 단계들보다 수십 배의 시간을 들여야 한다. 게임이 제공하는 여러 단계들 중에서 가장 주가 되는 플레이라는 것, 그리고 이전 다른 단계들이 마치 들러리로 보인다는 것에서 심몽땅설이 설득력을 갖는 건 여기에 이유가 있다.

부족한 멀티플레이 인터랙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저들이 만든 크리처 데이터베이스'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스포어는 우주 단계에서 발견하는 다른 생물들을 인터넷을 통해 다른 플레이어들이 만들어 업로드한 크리처들로 다운로드 받아서 뿌려준다. 혹시 정품을 구매한 다른 플레이어들 중 아는 플레이어나 스포어피디아를 검색해 괜찮은 크리처들을 만드는 플레이어를 친구로 추가해 중점적으로 받아올 수도 있다.

그래서 크리처 생성기를 이런 크리처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리 판매를 했던 것이었다. 크리처 생성기는 그 자체로 데모의 역할과 티저의 역할과 기술력의 과시와 개발 상황의 보고 뿐만아니라 결정적으로 스포어 우주를 만드는데 필요한 크리처 수를 확보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고 훌륭하게 달성했다. 이렇게 다목적의 머리 좋은 작전이라니.

하지만 스포어의 멀티플레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 자체가 실시간으로 흘러도 별로 상관이 없을 듯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강제로 실시간으로 놓고 멀티플레이를 하게 하지도 않았다. 네트워크를 이렇게 '유기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면 멀티플레이를 고려해볼만도 했을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어가 그냥 싱글 플레이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라고 만족할 수 있다. 아쉬움은 그저 '멀티플레이'에 대한 아쉬움일 뿐이지 게임 자체의 흠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

'만들어서 가지고 논다'는 어디로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스포어는 윌 라이트가 만들었다는 것에서 점수를 깎을 수 밖에 없다. 장난감론의 대표인 그 윌 라이트가 만든 게임이라고 보기에 스포어는 뭔가 부족하다. 일부에서 회자되듯 '확장팩으로 보충하려나'하는 의혹은 게임 자체의 평가에 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확장팩은 확장팩 나름의 완성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 본래 게임의 미완성을 보충해주는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으로, 우주 시대를 배경으로 스포어를 플레이하는 내내 '우리가 선진 문명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 같아 왠지 씁쓸하다. 식민지에 딱 적절한 행성을 차지하고 있는 미개한 지적 생명체들을 싹쓸이탄으로 날리거나 몸소 번거롭게 폭격을 날려 쓸어버리고는 유유히 T3 행성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이 내 잔인함이 또 두렵기도 하다.

  • 그리고 이렇게 까고 있지만 난 스포어를 '아주^2' 재미있게 하고 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